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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9일 밤 11시경,
늘 하던대로 자기 전에 담배 한대 피고 집에 물이 다 떨어져서 물이나 한병 사 오려던것 뿐인데, 신발에 남은 미처 닦지못한 눈 때문에 계단에서 제대로 미끄러졌고 오른쪽 발목이 아작났다. 육중한 내가 넘어지는 소리가 온 복도에 울려퍼졌고 나는 악 소리도 내지 못했다.
뼈가 부러져 본적은 한번도 없지만 직감적으로 골절임을 알았다. 겪어본 고통중에 제일 아팠다.
감히 일어서기를 시도하다 더 큰 고통을 느끼고 주저 앉았다.
한발자국도 못 움직이겠고 아파 죽겠고 야밤에 부를 사람 없는 1인 가구라 결국 119를 불렀다. 고작 발목 부러진걸로 119를 불러도 되나 싶었지만 막상 계단을 올라오는 구급대원님들은 구세주 같았다.
그렇게 노브라 잠옷 바람에 패딩만 입고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로 갔다. 실려가는 와중에 이러저러해 내일 회사에 못가겠다고 성실히 보고 했다. 슬픈 노예의 삶.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정말 박살이 나 있었다. 두 군데나.
대충 깁스와 통원 치료로 떼워질 줄 알았는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머릿속에 세글자가 스쳐 지나갔다. 망했다.
수술과 입원을 해야하니 우선 코부터 찌르고, 피검사와 심전도검사까지 마친 후, 아무것도 모르고 곤히 주무실 모친께 아닌 밤중에 불효를 저질렀다. 엄마, 내 지금 발목이 부러져서 응급실에 와있다. 어, 수술해야 된단다.
이 와중에 소변검사는 도저히 소변이 안 나와서 못했다. 간호사님이 5분있다 다시 올까요? 를 두번 반복 하게 해드렸고 결국 내일 외래와서 하세요~ 라는 답을 들었다.
아무튼 그 밤의 난리는 30만원 가량의 응급실 비용과 함께 마무리 되었다.
코로나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 까진 입원을 할 수 없어서, 우선 집에 가야했다. 망했다, 우리집은 엘베없는 3층이다.
목발로 계단을 오르는 일은 왼쪽 발목도 마저 부러뜨리겠다는 소리 같았다. 비참함을 삼키며 무릎으로 한칸 한칸 계단을 기어 올라 아무튼 집에는 도착했다.
나를 불쌍히 여긴 친한언니가 아침일찍 집에 와주었다.
평생 은인으로 모시기로 했다.
언니의 도움으로 무사히 외래 진료를 할 수 있었다.
언니가 먹이고 입히고 휠체어도 태워줌 ㅠㅠ
엑스레이와 CT를 자세히 보니 두군데 인줄 알았는데 세군데나 부러졌다. 거기다 인대까지 파열되었다고 했다. 아주 박살이 난거다. 이 정도면 발목 위로 차 바퀴가 지나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지 않을까.
결과를 들은 언니는 눈물을 글썽였다. 얼마나 아팠을까, 하며.
정작 미련곰탱이인 나는 응급실에서 의사에게 아픈걸 잘 참는다는 말이나 들었다. 사실 내 얘기를 들은 모두가 너는 그렇게 크게 다쳐놓고 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냐고 했다. 눈물 한방울 안 흘린 내가 신기했나보다. 갈빗대 세개 정도는 나가야 나는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인가. 나는 뭘까.
코로나 검사 결과가 안나와서 다음날 입원 해야 한다고 했다. 전날 못한 소변검사를 커피 한잔과 포카리 500미리로 겨우 해내고 진통제를 받아들고 집으로 갔다.
파히타를 시켜먹고 언니가 집도 치워주고 갔다. 내눈엔 그냥 조금 지저분한 정도였는데 언니 눈엔 아수라장이었던 모양이다. 부러진 발목을 핑계 삼아 편히 침대에 앉아 치워지는 집을 바라보자니 몹시 송구스러웠다.
오후 기차를 타고 엄마가 헐레벌떡 왔다.
이런 식으로 우리집에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서울에 이사오고 처음으로 엄마가 왔다.
차라리 다친채로 와서 다행인듯 싶었다. 잔소리를 덜 먹었다.
제발 그만하고 앉으라고 다섯 번 쯤 말했지만 엄마는 앉을 새가 어딨냐고, 언니가 치워서 이미 너무 완벽한 내 집을 치우고 또 치웠다. 엄마 눈엔 아마 고물상 같아 보였나보다. 물 묻은 고무장갑으로 세븐틴 물건들을 치우길래 우리 애 얼굴에 물 묻는다고 조심하랬더니 30살이 코앞인 가시내가 도대체 언제까지 정신 못차릴거냐고 되려 욕을 먹었다. 10년 뒤에 아마 30이 40으로 바뀐 똑같은 잔소리를 하시게 될 거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엄마가 차려준 김치볶음밥을 먹고 다음날 입원을 하기 위한 짐을 싸고 잠이 들었다. 옆으로 누워 웅크리고 자는 인간인데 발 때문에 정자세로 자려니 잠이 안왔다. 지쳐서 겨우 몇시간 쯤 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에 주저 앉아 다친 발만 바깥에 내민채로 엄마에게 씻김을 당했다. 내가 스스로 씻기 시작한게 한 9살 무렵이니 한 20여년만에 엄마는 딸을 씻겨보는 거 겠지. 물론 그 때보다 50cm는 더 크고 몸무게도 50kg는 더 늘어났지만.
머리를 말려주는 엄마한테 다치니 좋구만, 이라는 개소리를 했다가 주디를 꼬매버린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 조금 울컥했지만 우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눈물을 참으며 입이 찢어져라 애꿏은 하품을 두 번 했다.
입원의 날이 밝았다.
짐을 챙기고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입원 수속을 밟고 병실로 향했다. 동네 탓인지 병동에서 내가 가장 어린 환자였다. 모두들 젊은 아가씨가 어쩌다 입원까지 하게 되었는가 안타까워 하셨다. 그래도 젊으니 뼈는 빨리 붙겠네, 하시며.
망할놈의 코로나 때문에 보호자 상주도, 면회도 금지라고 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입원인데 보호자도 없이 혼자 2주를 지내야 한다. 솔직히 좀 겁났다. 내향의 끝판왕인 내가 또래도 없이 어르신 가득한 병실에서 혼자 2주를 잘 버티고 있을 수 있을까. 수술이 끝나면 엄마와 빠이빠이 해야한다니.
링거를 꽂고 병실에 누워 있자니 몇시 수술인지도 모른채 자정부터, 정확히 말하면 전날 저녁 먹은 이후 부터 금식을 했더니 매우 배가 고팠다. 하지만 당일 수술은 젊을 수록 수술 시간이 뒤로 밀린다는 감히 억울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저 기다려야 했다.
졸음이 오려는 찰나 갑자기 수술 들어가실게요~ 하며 간호사 선생님이 오셨다. 이동 침대에 실려 엄마의 걱정어린 시선을 받으며 얼떨떨하게 수술실로 들어갔다. 사실 장기를 꺼내서 하는 수술도 아니고 겁은 별로 안났다. 척추 마취 주사가 오질나게 아팠다는 것과 수면마취가 신기했다. 레드썬! 하듯 잠들 줄 알았는데 그냥 서서히 졸음이 밀려 오더니 어느 순간 잠이 들었고, 간호사가 깨우기 전에 일어난것 같았는데 뭐 어차피 수술하는 곳엔 감각이 없으니 그냥 눈감고 기다렸다. TV에서 나오는 수면마취 후 헛소리 같은걸 조금 염려했으나 그냥 몽롱하기만 하고 말았다.
몽롱한 채로 엑스레이를 찍고 병실로 다시 실려왔다. 수술은.... 한 두시간 한 것 같다. 사실 자세히 모르겠다. 입도 말라 죽겠고 배도 고파 죽겠는데 물은 2시간 이후에 먹을 수 있으며, 6시간 이후에나 고개를 들 수 있으니 밥을 6시간 이후에 먹으라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6시간이 6일 같았다. 솔직히 5시간 쯤에 벌떡 일어나고 싶었지만 그러다 일어나는 불상사로 욕을 먹고 싶지 않았기에 잠자코 누워 있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제일 먹고 싶은건 탕수육이다. 망할 병문안도 안되고 환자 외출도 안되는 탓에 엄마가 사놓고 간 편의점 과자 외엔 입원 6일차인 지금까지 아무 바깥음식도 먹지 못했다. 퇴원 하자마자 아아를 벌컥벌컥 들이키고 탕수육을 허버허버 먹을테다.
생애 첫 입원 6일 차인 지금 느끼는 건, 이 입원 생활은 정말 괴롭다는 것이다. 아파서 괴로운 건 당연하고, 보호자며 면회가 안되니 외로워서 괴롭고, 출근 할때도 6시 반에 일어나는데 5시만 되면 혈압이랑 체온을 재러 오신다. 아침이라곤 고등학교 졸업하고 먹어 본 기억이 잘 없는데 7시마다 꼬박꼬박 일어나 밥도 먹어야 한다. 그리고 씻지 못한다. 지금 내 머리는 샴푸 세번 짜도 거품이 안 날 것 같은 기름을 머금고 저 세상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너무 괴롭다.
24시간 후면 드디어 바깥 공기를 마실 수 있다.
나간 후로 한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을 것이다.
밤에 나가지도 않을 것이다.
내 발목을 아작낸 신발은 당장 버리고 싶은데 새로 사고 두번 밖에 안 신어서 좀 고민 해봐야겠다.
두 발로 걷는 자들이여 행복함을 알며 매사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히 내 딛으라. 내 경험으로 가로되 멀쩡한 다리가 부러져 나앉게 되는 것은 한순간이더라.